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마차시 1세 (문단 편집) == 후계 문제 == 마차시는 1455년 12살의 나이로 첼레 백작 울리크 2세의 딸 엘리자베트와 결혼했다. 그러나 엘리자베트는 1455년 말에 원인 불명의 질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보헤미아의 후스파 권력자이자 나중에 국왕으로까지 선출되는 [[이르지 스 포데브라트]]의 딸 카테리나와 1461년에 결혼했으나, 카테리나마저 1464년 1월 또는 2월에 태아를 낳던 중 아기와 함께 사망했다. 그 후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브란덴부르크]] [[선제후]] [[프리드리히 2세(브란덴부르크)|프리드리히 2세]]와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 등 여러 군주들과 결혼 동맹을 제안했지만 좀처럼 성사되지 못했다. 1474년 10월 30일, 마차시는 나폴리 국왕 페르디난도 1세의 딸 베아트리체와 약혼하고 1476년에 정식으로 결혼했다. 그녀는 엄격한 성격의 소유자로, 남편을 구슬려서 신하들이 왕의 처소에 함부로 접근하지 못하고 오직 시종을 통해서만 국왕에게 의견을 개진할 수 있게 했다. 마차시는 그녀를 맞이한 이래로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는 르네상스에 많은 관심을 가져 헝가리에 르네상스가 퍼지는 것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자식이 태어나지 않았다. 마차시는 1473년 니더외스터라이히 슈타인 시의 유지의 딸인 바르바라 에델푀크와의 사이에서 사생아 코르빈 야노시를 낳았다. 그는 본래 이 아이를 교회에 보낼 생각이었지만, 정실 왕비와의 사이에서 자식을 좀처럼 보지 못하자 마음을 바꿔 왕위 계승자로 삼기로 마음먹었다. 1470년대 중순에 코르빈 야노시를 후계자로 지명하고, 사로스 성을 영지로 주는 것을 시작으로 글로가우 공작을 검은 군대로 몰아내고 그 땅을 영지로 줬으며, 슬레스코 일대의 여러 영지를 추가로 주고 헝가리 왕국의 모든 요새 사령관들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여기에 더해 밀라노 공작의 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의 결혼을 주선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심지어 코르빈 야노시의 어머니 바르바라 에델푀크를 궁정에 초대해 왕실의 일원으로 삼았다. 베아트리체 왕비는 남편의 이같은 조치에 분노해 바르바라와 코르빈 야노시 모자를 상대로 첨예한 갈등을 벌였다. 말년에 죽음을 눈앞에 둔 마차시는 베아트리체의 형제이자 칼라브리아 공작인 알폰소에게 "헝가리 사람들은 여자가 이끄는 정부에 복종하는 것보다 끝까지 싸우다 죽기를 택할 것이다"라며 베아트리체를 설득해달라고 요청했다. 그러나 베아트리체는 끝내 코르빈 야노시를 양자로서 받아들이라는 남편의 권고를 듣지 않았고, 마차시는 후계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하지 못한 채 사망했다. 그 후 헝가리 의회는 코르빈 야노시를 왕으로 받들어달라는 마차시의 유언을 묵살하고, 헝가리-크로아티아 왕국의 전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울라슬로 1세]]의 친조카이자 폴란드 국왕 [[카지미에시 4세]]의 아들인 보헤미아 국왕 블라디슬라프를 새 국왕 [[울라슬로 2세]]로 옹립했다. 그리하여 후녀디 왕조는 1대만에 단절되었고, 헝가리는 마차시 사후 36년만에 오스만 제국에게 멸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